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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노트-느헤미야 13:4-9, 하나님의 전의 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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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storLee 작성일20-03-06 18:42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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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의 큰 방

느헤미야 13:4-9

 

구약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고 또한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 역사의 기록들이 역대상,,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구원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그 말씀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개인들의 신앙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인간적인 반성입니다. 그 반성의 결과로 그들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지요. 느헤미야의 입에서 나온 이 고백도 그런 결심의 하나입니다. 2:17,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무슨 수치일까요? 멸망의 수치와 고통, 포로의 수치와 고통, 그 통렬한 고통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그 결심속에서 성벽재건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방해와 위협을 물리치면서, 성벽재건을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느헤미야서의 말씀이 만약 역사의 한 드라마요 영화라면 성벽재건으로 The End 되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느헤미야 13장에서는 화려한 끝으로 마무리 되지못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성전의 큰방을 차지한 도비야의 사건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의 우리들 삶에서도 인간 내면의 반성과 회복이 필요한 때가 있음을 배웁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경계할 일과 용납해도 될 일의 사이가 선명하지 못할 때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백성들은 힘을 모아서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6: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만에 끝났습니다. 이 백성이 성벽재건하는 것을 원치않는 주변사람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니 다들 정신을 차리고 한손에 무기들고 한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 때는 오직 성의 재건만을 위해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을 재건하였고, 예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큰 역사를 마치고 목표를 성취하였는데 느헤미야가 바벨론 수산궁에 가 있는동안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이 조용히 도비야를 불러들였습니다. 성전에 큰 방을 만들어서 그가 살도록 했습니다. 도비야가 어떤 사람입니까2장을 보면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을 재건할 때에, 그 일을 비웃고, 방해하고 위협합니다. 5:3절에서는 조롱합니다. “암몬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유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이웃지역의 지도자인 산발랏과 게셈과 함께 사람들을 충동해서 방해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 도비야의 뜻은 사실 좋은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다는 뜻이니 얼마나 그 이름이 좋습니까? 포로로 돌아온 백성중에도 도비야란 이름이 있습니다. .... 그런데, 그는 자기들의 모든 욕심을 이룰수 없게 되자, 방해자가 되고 위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도비야와 산발랏의 위협 때문에, 포로귀환한 백성들은 성을 지으면서 무기를 차고 벽돌을 날라야 했습니다.

 

그런 도비야를 제사장 엘리아십이 성벽 안으로, 더욱이 성전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성전의 제물들을 보관하는 방을 고쳐서 제사장이 도비야를 위해 그 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성전, 그 은혜의 자리에 부정한 이를 위한 큰 방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벽재건의 큰 목표를 이룬후에 사람들의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흐려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계해야 할 일과, 용납해도 될 일에 대하여 기준이 명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오늘날 가정과 일터에서, 또한 사회에서 생겨나는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그런 경계하여 구별의 삶을 살아야 할 선이 흐려짐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중에 나타나는 틈새와 같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식의 사각지대입니다. 구약시대나 오늘날 사람들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비슷합니다. 인간의 욕심과 이득을 위해서는 알면서도 죄를 용납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말씀을 보면, 수산궁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도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성전을 정결하게 해서 다시금 하나님의 전이 성전답게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정화의 사건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에 성전안에서 돈바꾸고 제물을 매매하는 사람들을 몰아냈습니다. 마태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당연히 정결해야 할 성전 안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우리들 마음내면의 정화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이 성전이요, 삶이 예배이다”(김진홍) 현대 신앙인에게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살자면, 우리의 심령안에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고 내어버리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판단력이 떨어져서, 경계할 것과 용납할 것의 구분이 쉽지 않은 분들은 더 많은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주간에도 모든 분들께서 하나님의 집의 큰 방과 같은 나의 내면을 정화하며 삽시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상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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