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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야기 (Beautiful Story)

장 기려 박사의 숭고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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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자권사 작성일18-04-15 15:44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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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기려 박사는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막사이사이상, 부산시민상,호남상 등을 수상했음                   위키배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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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기려박사는 돈 없는 이에게는 자기의 피로 수혈을 하기도 했다                                                위키백과에서



​귀한 글 '장 기려 박사의 승고한 삶'을 보내주신 

이 희정 권사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실은 원인 모를 테크닠의 착오로 이 귀한 글의

마지막 부분이 몇번의 시도에도 오르지를 않아서

부족하지만 인쇄된만큼을 올리게 되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요지는 전달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토록 훈륭한 의사님이, 정말로 우리

예수님을 닮으신 어르신이 계셨다는 일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며 이런 성인같으신 분들이

계속 나오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 희정 권사님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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ì¥ê¸°ë ¤ì ëí ì´ë¯¸ì§ ê²ìê²°ê³¼                                                                                                                                                       위키백과에서


★ 장기려 박사의 숭고한삶 

장 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왔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그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걊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그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그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그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지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곤 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그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 당한 이후부터 어려운 한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곤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그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게 되었을 때,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 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이 평양을 철수하게 

되면서 장 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타게 되었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 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 장 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서약했다.

장 기려는 경성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하나님 앞의 이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그는 초창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 수대고 나누었다.

식구 수가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있던 장기려는 운전기사와 같은

돈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에 직원들은 '공산당 식 분배 정책'이라며

처음에는 어색해 했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 기려,

그는 춘원 이 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 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쳐,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 광수는 장 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병원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 기려 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켰으며 이것이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가도 힘들었던 그 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 외과의사였던 그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자기 워급 이상의 수술비가 나오면 병원을 탈출시켜주고...

평양 시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이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고...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을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그 자신은

분단된 조국의 피해지이기도 했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자식 5남매를

두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그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1985년 정부의 방북 원율를 거절했다.

나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나겠다고 ...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 못한채 

19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묻자,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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