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 (Beautiful Story)

어린이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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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자권사 작성일18-05-05 16:41 조회1,2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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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서




어린이의 믿음
김 상길 -


중세 때 이야기입니다. 
한 성당에서 찬양대원들이 열심히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한 어린이가 지휘자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지휘자가 물었습니다. 
“저 찬양대원이 되고 싶어서요.” 

소년의 대답에 지휘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찬양대는 어른만 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어린이는 받아들일 수 없단다. 너는 안되겠다. 

네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자 이 당돌한 꼬마는 맑은 눈빛으로 

지휘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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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서



“지휘자님,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요.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왔어요.” 

주님께서 쓰신다고 했다는 고백을 들은 지휘자는 

감동을 받고 그 어린이를 찬양대원으로 발탁합니다. 
그 소년은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찬양도 탁월하게 잘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창작한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김상길 논설위원)


제공하신 이 : 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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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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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1483-1546), 95개조 논제룰 성문에 계시                   위키백과에서




마르틴 루터는 대학 교수이면서 종교 개혁자이었고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등을 짓기도 하며 

'가족의 음악'도 장려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 위키백과에서 -


우리의 귀한 어린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찬송가'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그들의 순수한 '믿음'이 곱게 성장하도록

부모로써 정성을 다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이 일을 위해 손자와 손녀들을 무릎에 앉히고

항상 행복하게 찬송을 부르시던 저의 시어머님의

귀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 일의 귀함도 모른채

허송세월했던 제자신이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장성한 자식들의 '믿음생활'의 열성을 보며

시 아버님과 시어머님의 '순박한' 믿음의 전승(傳承)을

새삼스럽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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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찬송 광경 (독일의 화가 구스타프 슈팡겐바르크의 작품)                                 위키백과에서


- 참고 -


마르틴 루터(독일어Martin Luther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다.[1]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 

비판하고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그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의 대량 세일을 하는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

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오직 성경의 권위을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였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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